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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유일하게 [성님]이라고 부르는 분이 있으니 바로 악몽의 강원도 프로젝트를 함께 했었던 J선배다. 워낙 처음 술한잔 마시면서부터 죽이 척척 맞는 바람에 그날부터 그리 부르며 뫼시게 되었긴 했는데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다. 사실 곰곰히 돌아보면 지금껏 이 회사에서 경험한 프로젝트중에 난이도나 업무 강도로 따지면 좀 아래쪽을 차지할만한 프로젝트임에도 악몽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당시 겪었던 실연 덕분이었다. 어쨌든 겨울 악재 징크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한겨울에 이별을 하였고, 거의 정신이 70%는 나간 상태로 강원도로 돌아와서는 온전히 폐인처럼 두달을 보냈더랬다. 어디 빚지는걸 죽어라고 싫어하는 성격탓에 아무리 힘들어도 회사일 같은것을 놓아버린다거나 하는 경우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없는데 그때만큼은 온전히 회사 일이고 프로젝트고 나발랭이고 놓은채 두달을 보냈더랬다. 아마 관련한 일로 압박이 들어왔으면 사무실을 들어엎었으리라 생각될만치 아예 넋이 나가있던, 완전한 자포자기와 절망과 한숨만 소용돌이치던 시절이었는데 다행히 무사히 넘어갔던 것은 절대적으로 J성님의 덕분이었다. 아예 넋을 놓고 두달동안 일도 안하고 술만 퍼마시는 후배놈을 전방위적으로 커버해줌으로써 실연때문에 회사에서 잘리는 전대미문의 얼간이가 되지 않고 넘어갔으니, 그런 분과 또 그 순간에 그렇게 함께 할 수 있었으니 복도 그런 복이 없고, 운이 좋아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던 것이랄까. * 간만에 간이 딱딱해지는게 느껴질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은 날이었다. 갱제가 어렵다보니 이래저래 같은 회사여도 팀간에 서로 비용문제로 인한 눈치싸움이 참 격하게 일어나는 요즘인데 덕분에 팀장님께 버티고 버텨라! 라는 지령을 받은채 볼꼴못볼꼴 보며 휴가까지 까먹어가며 일하고 있는데 참 되도 않은, 어쩌란건지 모르는 태클덕분에 스트레스라 꼭지까지 올라와있던 상황이었는데 다행히도 다른 방에서 비슷한 상황으로 고생하고 계신 J성님이 계셨더랬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모니터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데 메신저창이 뚜구둥 열리더니 강원도의 기억이나 떠올리며 저녁 대신 맥주와 통닭이나 먹자신다. 얼씨구나 하고 달음질쳐 내려가서 가까운 호프집을 찾았다. 그러고보면 작년에 참 이래저래 서로 다른 프로젝트에 팔려다니느라 서로 떠들썩하게 이야기보따리를 푼지도 오래 되었는지라 이래저래 쉴새없이 웃고 떠들며 배를 채웠다. 이럴때면 맥주 두어잔 정도로는 얼굴색이 변하지 않는 체질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한참을 왠갖 이야기를 풀어내다가 다음을 또 기약하고 일어서서 태연한 얼굴로 사무실로 복귀해서 키보드를 도닥거리는 중이다. 어느샌가 머리속엔, 밥 대신 술로 배를 채우던 강원도에서의 그 기억들이 방울방울이다. 제법 끔찍했던 기억들도 있지만, 또 지금 와서 돌아보면 제법 쓴웃음이 나면서도 아련히 그리운 기억들도 있다. 이를테면 술에 취해 여관방에서 쓰러져 잠들었다가 일어났는데 벽에서부터 타고 나와서 내가 발로 걷어차서 엎어놓은 맥주캔까지 기나긴 행렬을 이루고 있던 개미 300마리의 기억같은것. 내가 참 그때 제정신이 아니긴 아니었던 것 같다. 그 모양을 보고도, 니들도 먹고 살자고 그러것제 하며 다시 등을 돌려 쓰러져 잠들었으니. 물론, 나중에 주말쯤 보드를 타러 내려와서 내 여관방에 하루 묶었던 K과장님 덕분에 팀에 매듭이는 개미랑 같이 산다더라(...) 는 괴악한 소문이 돌기도 했었더랬지. 하하. * 어쨌든 사람은 누구나 시간과 싸워야 한다. 나이를 먹어가며 새로이 생겨나는, 그리고 잃어버리는 것들을 때론 부여잡고 때론 놓아보내며 그렇게 시간과 적당히 싸우고 적당히 친해지는 법을 익혀가며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다. 물론 그런 싸움의 와중에 가장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기억에 대한 부분이다. 나는 아마, 앞으로 점점 더 많은 것들을 잊어버리게 될것이다. 지금은 너무나 생생하고 선명한 기억들이 어느 순간에는 낡은 사진처럼 빛이 바래고 구석구석 낡아 떨어지는 기억들이 되어갈것이다. 아니, 그것은 단지 기억의 풍화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본다면 그것은 기억의 정제다.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시간들이 짧아지면서, 내가 반드시 죽는 순간까지, 눈을 감는 순간까지, 혹은 죽음이라는 여행길에 올라서까지 지고가야할 기억들을 하나 둘씩 골라내는 것이다. 무거운 짐을 들고 떠나기엔 오랜 여행이 될것이기에, 최소한 짐을 줄이고, 내가 이고 지고 갈 수 있는 최소한의 기억들만을 남겨놓고 시간은 서서히 그 나머지 것들을 깊은 기억의 호수바닥 밑으로 가라앉히는 것이다. 어느날 문득 바람이 불때 침전물처럼 떠오를 수는 있더라도, 그것을 항상 명확하게 더듬어갈 수는 없는. 어떤것들은 미생물과 함께 분해되어버리는. 그런. 그런 기억의 정제작용을 거치고 나서, 정말로 눈을 감는 순간에 내 머리속을 스쳐가는 기억들은 어떤것들이 남겨져있을까. 아마도 그 순간에 남겨지는 기억들이라면 내 삶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가장 따뜻한 기억들이 아닐까. 그리고 섣불리 예상하건데 그것들의 8할 이상은 내가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기억들일 것이다. 내가 사랑을 몰랐더라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나의 기억들은 얼마나 비루하고 보잘것없을 것인가.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남는 장사다. 언제나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항상 말하듯, 진심을 다해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기억이라면 그것은 그 사랑 이후의 삶 전체를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드는, 든든한 에너지가 되고 재산이 되어 남는것이니까 말이다. 마치, 지금도 창밖을 내다보면 한눈에 들어오는 어떤 거대한 백화점 앞을 서성이던 그 여름날의 나와 같은 것 말이다. * 한참을 방울방울 허공으로 떠오르는 추억들을 더듬고 있는데 때마침 주머니가 부르르 떨리더니 메세지 도착을 알린다. 퇴근한다는, 힘들어서 어떻게 하냐는 애인님의 문자다. 문득 가만히 미소가 흘러나와서 통화버튼을 눌렀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고 언제나와 같은 멘트를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으려는데 갑자기 크게 웃으시더니 오늘따라 왜이렇게 달콤하게 얘기하냔다. 그러고보니 오랫만에 밥대신 술로 배를 채웠더니 살짝 속이 뜨끈거리는 것 같다. 아, 이 은근한 알콜기운에도 발동해버리는, 본능의 영역에 가까운 애교혼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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